미국에서 조사한 한국인 위안부 자료

by Suezanchoi posted Jul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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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Korean Comfort Women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한국인 위안부들

 

 

 

LIVING AND WORKING CONDITIONS

 

생활과 업무 조건

 

In Myitkyina the girls were usually quartered in a large two story house (usually a school building) with a separate room for each girl. There each girl lived, slept, and transacted business. In Myitkina their food was prepared by and purchased from the "house master" as they received no regular ration from the Japanese Army. They lived in near-luxury in Burma in comparison to other places. This was especially true of their second year in Burma. They lived well because their food and material was not heavily rationed and they had plenty of money with which to purchase desired articles. They were able to buy cloth, shoes, cigarettes, and cosmetics to supplement the many gifts given to them by soldiers who had received "comfort bags" from home.

 

 

 

미트키나에서 여성들은 대개 큰 2층 가옥(주로 학교 건물이었던)에서 생활했으며 각 여성마다 하나의 독립된 방을 제공받았다. 그 방에서 각각의 여성들은 생활하고, 자고, 비즈니스를 행하였다. 미트키나에서 그들의 음식은 위안소 업자를 통해 제공받아 구매하였으며, 일본군으로부터 식량 배급을 받지는 않았다.

 

다른 장소들에 비해 버마에서 그들은 호사스러운 수준으로 살았다. 이는 버마에서의 2년째 생활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그들은 (병사들과 달리) 음식과 물품이 심하게 통제되어 배급되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가지고 싶은 물건들을 구매할 많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잘 살았다. 그들은 옷, 신발, 담배, 화장품을 살 수 있었으며 집으로부터 "위안 가방"을 우송받은 병사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다. 

 

While in Burma they amused themselves by participating in sports events with both officers and men, and attended picnics, entertainments, and social dinners. They had a phonograph and in the towns they were allowed to go shopping.

 

버마에 있는 동안 그들은 장교들과 다른 남자들과의 운동 경기에 참가하였으며 소풍과 각종 오락, 사교적 저녁 식사 등에 참가하며 스스로를 즐겁게 하였다. 그들은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도시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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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을 샀다는 위안부 할머니도 계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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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생각해볼까요.

민중사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밭을 메고 있는데 갑자기 위안소로 끌고가고

길에서 걸어가는데 갑자기 위안소로 끌고 가거나 그랬으면

왜 그들의 아빠,오빠,남동생들이 저항하고 주민들이 대규모 결사저항을 했다는 이야기가 없고

그 강제로 끌려가 순결을 빼았겼을 한맺힌 위안부 문제가 왜 전후 50년 가까이 지나서 1990년대 초에 갑자기 튀어나왔을까요?

그 동안은 뭐하다가?

일본정부에선 지면에 공고를 제대로 했지만 시골의 가난한 부모가 딸을 팔아넘기거나, 한국인 모집책이 속여서 데려갔을 수는 있지요.

위안부 뿐 아니라 징용자들 중에도 한국에 머물던 가장이었던 형이 대신 임금을 수령하고 다 탕진하고 그런 기록도 있습니다.

 

한국,일본과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기록하는 미국 양키들이 발행한 자료는 저랬으며,

해방후 나온 위안부들의 기록에서도 그들은 자유로운 생활을 했는데,

지금 그들의 주장처럼 강제로 끌려가 순결을 빼앗긴 처녀가 수십만명이 있었다면 해방직후 난리가 났어야 되는데

해방후 50년 가까이 아무 말 없이 있다가 90년대 초부터 갑자기 이런 이야기들이 터져나온 건 왜 그런 걸까요?

해방이후 60년이 지나서는 갑자기 이전까지 듣도보도 못한 위안부로 고깃국을 만들어 먹은 얘기라며 나온

갑툭튀한 증언은 또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건가요?

 

일본은 중국에게와는 달리, 대만,한국은 일본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썼으며

지면에 광고도 하고 상식적으로 많은 돈을 주면 한다는 사람들이 널렸었고 저항도 안 생기는데

뭣하러 강제로 끌고가서 일부러 저항만 생기게 하고 오히려 긴텀에서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하게 만들까요?

 

 

민중사학자들은 토지의 40%도 수탈당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토지정리 사업을 하면서 신고자가 없어서 초기에 "국"을 찍어둔 토지들도

신고자가 다 나온 시기에는 거의 100%에 가깝게 토지가 원래 주인들의 소유로 귀속되었습니다.

이것도 민중사학자들 주장대로라면 해방직후 토지소유권에 대한 소송이 남발했어야 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죠.

 

 

쌀이 수출된 것은 총독부가 강제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쌀값이 30%정도 높았기 때문이지요. 수출을 하면 농민과 지주는 더 많은 소득을 얻게 되는데 사치품인 쌀을 서민중에서 누가 먹을까요? 그걸 팔고 더 많은 양의 잡곡,콩,생필품을 사지.

왜 빼앗아 가지 않고 돈을 주고 샀냐고요? 그냥 빼앗아 가면 어떤 바보가 생산을 하나요?

통계적으로 조선의 농업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건 돈을 주고 사갔기 때문입니다.

 

 

징용도 이미 앞서 글의 댓글에서 말했지만, 수백만명이 태평양 전쟁 오래전부터 이미 사기업에 자유롭게 일하러 가있었고,

이런 워홀자들이 가기 꺼려하는 전쟁기업,광산등에 배치를 위해 일본정부에서 일본취업희망자중 1939년부터 징용대상자를 데려갔고, 이들도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벌수 없을 만한 월급이 나왔으며, 그조차 현재 한국의 징병제와 같은 강제성을 지니게 된게 1944년 9월경부터입니다. 이때도 안 가면 법적처벌을 받았지 끌려간게 아닙니다.

그리고 군함도에 나오듯 징용소마다 무슨 감옥처럼 패고 군경이 감시하고 그런 거 없었고, 도박,음주가무등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고요.

일본기업과 정부는 갑작스러운 일본의 패망에 뱃길로 황급히 추노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평균1~2달치 월급을 못 받은 서류를 전부 꼼꼼하게 챙기고 자료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이 노비의 나라였던 건 아시죠?

한때는 노비가 인구의 4할이었던 나라.

백인들처럼 정복지의 다른 인종들을 노예로 부린 것도 아닌

같은 민족의 아들딸들을 사고 팔며 대대손손 엄청나게 많은 자국인을 노비로 부린 유례가 없는 나라.

예쁜 여비들은 양반의 노리개로 쓰이고, 이게 들키면 마님에게

여비가 매질 당해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나라.

 

 

일제는 노비를 금지시키고,

돌팔매질을 스포츠로 즐겨서 사망자도 나오던 미개한 놀이풍습 금지시키고,

철도 및 기간 산업 깔고,

수백년간 서구와 교류하던 일본은 조선의 교육,사법,행정 시스템을 서구화 시켜버리고,

일본의 전체예산 30%를 조선의 행정력을 운영하는데 썼습니다.

또 조선총독부는 한양 길거리에 즐비하던 똥치우는 위생사업에 막대한 예산을 매년 들였습니다.

일제시대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평균수명도 크게 늘어난 건,

같은 민족에게 염전노예처럼 당하던 수탈보단 일제시대가 그나마 나았다는 증거가 아니고 뭘까요.

 

 

당시 양반들에게 물건 취급받던 상당수의 조선노비들에겐 차라리 일제가 천국이었을 듯 싶네요.

오죽했으면 이 썩어빠진 노비의 나라에서 더는 못 살겠다고 일진회가 합방청원을 했겠습니까.

조국 민정수석이 죽창정신을 이어받자고 빨던 동학농민군의 상당수 세력들이 넘어가 세웠던 그 일진회 말이에요.

 

 

민비가 청나라,일본을 끌어들여 동학농민군이 조선정부군,청나라군,일본군과 교전도 했었죠.

난을 진압하면서 동학군이 수천명 죽어나갈 때 일본군은 1명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지금 조국이 몇개월 뒤 총선승리를 위해 승산없는 싸움에 국민들에게 죽창을 쥐여주고

동학군처럼 내모는게 민비가 빙의한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노비들이 당하던 노예노동의 수탈은 같은 민족들에게 당한거니, 일제에게 당한 수탈(이라고 칩시다)보다는 나은 걸까요?

좌파들은 마찬가지의 논리로 한반도에서 수백만이 죽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한 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전범세습 가족 김씨도 같은 민족이니까 일본보다 쉽게 용서가 되는 건가 보죠? 그런데 당장 옆집 사람이 소음만 일으켜도 같은 민족이라도 때려죽이고, 옆차선에서 운전 띠껍게 하면 같은 민족이라도 보복운전하는 사람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같은 민족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너그러워졌나요? 심지어 실존하는 핵무기위협에 대해 미국처럼 경제제재로 정권교체하는 시도에 기겁하고 같은 민족이니 남한이 세컨더리 보이콧 맞을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원조해주려고 시도하는 저분들은 으니일가를 용서하는 아량으로 같은 민족인 이명박근혜는 도저히 용서 못하겠나 봐요. 그래서 아님말고식 가짜뉴스 엄청나게 터트리고 일단 끌어내리고 밝혀진 먹은 뇌물이 0원이라도 감옥에 처넣고 보는 거죠. 저도 박근혜가 했던 것들이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닙니다만 북쪽에서 독재하느라 2천만명 섬노예처럼 부리는 으니를 사랑하는 박애정신의 1/10000 이라도 이명박근혜한테는 발휘가 안되나 봅니다. 자기네들이 좋아하는 같은 민족끼리 말이죠. 시사만화가에게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700만원 벌금형을 때리고, 유력 경제지 언론사 주필을 압력을 넣어 그만두게 하고, 전 정권에 있던 인사들은 적폐라며 모조리 감옥에 집어넣고, 언론들을 상대로는 고소고발 난무하며 피말리기하는게 독재가 아니고 뭘까요. 블랙 리스트 어쩌구 거리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더하고 있잖아요 지금? 이 사람들 표현의 자유 입에 달고 살면서 야당시절엔 온갖 가짜뉴스 퍼트리고 대통령 출산 풍자 그림 퍼트리던 사람들 맞아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수첩에 메모하는 박근혜는 수첩공주라고 조롱하던 인간들이 A4 대본을 대놓고 읽는 문재인은 우리 이니 이러면서 빨아주는 이중성도 멀미가 나는군요. 대통령도 없이 혼자 대통령 전용기로 해외순방을 다닌다거나(이희호는 민항기 이용했습니다) 대기업총수들 불려서 친여성,친가족 주제로 비공식오찬을 하는, 최순실보다 더 나대는 영부인은 또 어떻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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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가 증언한 한국인을 볼까요?

"내가 처음 본 한국 사람들은 일본 군복을 입고 있었다"

출처: 한국 근대사 산책 10 : 창씨개명에서 8·15해방까지 By 강준만

 

싸우고 점령당한 필리핀 같은 나라와는 다르게 전쟁 한번 해보지 않고

일본에게 부와 명예를 보장받은 고종이 비겁하게 자기는 뒤에 숨어버리고

대신들에게 왕의 명으로 자기를 대신해서 역적이 되라고 강요하고 싸인시켜서 식민지가 된나라.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식민지가 되어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싸워보고 점령당한 필리핀같은 나라들처럼 목소리를 내지 못한 나라.

이승만이 대규모 독립군이 있다고 사기치지 않았으면 일본과 같이 전범국으로 분류될 뻔한 나라.

소수의 독립군이 존재했지만, 일제시대를 산 다수의 민중들은 일제의 전투 승리 소식들에 환호성을 지르던 나라.

 

이제와서 "끝도 없이 영원히 지속되는" 피해자 코스프레하며 세월호 유가족들처럼 더 내놔라고 해도 아베가 호락호락하지 않네요.

밑에 다른 분이 댓글로 올리신 자료를 보니 일본에게서 수입을 안하면 경제가 달창나는 건 한국일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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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oec.world/en/visualize/tree_map/hs92/import/kor/jpn/show/2017/

다른 분이 링크하신 자료인데 클릭하고 들어가야 캡쳐이미지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각 세부품목별 점유율을 알수가 있습니다.

 

조국이 자식 외고 보내고, 1년에 그 지역 렌트,생활비를 포함해서 1억 가까이 드는 미국 대학에 자식들 유학 보내면서

청와대는 열심히 특목고 폐지하는 동안

뜨거운 애국심으로 열심히 일본차들 부수고 다니고, 유니클로에서 립스틱으로 옷들 좌악 긁고 다니고

일본제품 판매하는 가게 앞에서 조국이 말한 죽창 마냥 불매피켓 들고 뙤약볕에 열심히 서있어 보세요.

조국 민정수석은 자기 자식은 비싼 학비로 조국 자신이 혐오하는 미제 자본주의의 앞잡이 대학을 다니게 하는 동안,

남의 자식은 피켓 들게하고 이렇게 홍위병처럼 이용해먹는군요.

더듬어공산당이 자기네들 총선승리를 위해 님들보고 죽창 쥐어주고 일본에게 덤비라는 말 충실히 따르는 님들은

더듬어공산당 재집권 총알받이에요.

 

65년도 한일청구권협정 자체가 시작부터 개개인의 징용미불금에 대한 합의적 성격이었습니다.

한일청구권협정에 분명히 다 이야기 되어있습니다.

문재인이 민정수석할 때 문재인도 참가한 민관공동위에서 내린 결론은 65년 협정으로 이미 더이상 일본에게 청구하기 어렵다였고, 75년도에 정부가 징용미불임금을 한번 보상해줬던 것에 이어 노무현 정부때 한번 더 한국정부가 보상을 해줬던 사항입니다.

 

그래놓고 달라고 떼쓰고 일본기업들 재산 압류하고

한일청구권 협정 분쟁해결에 관한 매뉴얼에 나온 외교채널도, 3자중재도 거부하는 건

죽창말고 일본에게 먹일 카운터가 있으니 그런 거겠죠?

설마 최소 3,4년 걸릴, 강대국은 쌩까도 되는 WTO 재판결과 하나 보고 가려는 거는 아니겠죠?